![](/data/kbc/image/2025/02/17/kbc202502170044.800x.0.jpg)
올해 등단 30년을 맞이하는 허갑순 시인이 여덟 번째 신작 시집 『새벽이 환하게 오고 있다』(시와사람刊)를 펴냈습니다.
1995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한 이래 『꿇어앉히고 싶은 남자』, 『나를 묶어주세요』, 『강물이 흐를수록 잠은 깊어지고』, 『상처도 사랑이다』, 『나무들』, 『나무들 2』, 『그저 꽃잎으로 번져나갔다』 등 일곱 권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 출간 때마다 시를 보는 색다른 특색허갑순 시인의 시 세계는 시집을 출간할 때마다 시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시집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시집은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광주'라는 지역, 특히 1980년 5월의 민주화운동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겪은 시대 인식과 삶 속에서 체득된 사유와 감각의 서사가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항쟁을 기억하는 광주 시민에게는 5월이 주는 이미지가 남다릅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도청 앞 분수대와 금남로 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군인들의 총칼과 탱크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처절한 투쟁을 잊지 못합니다.
그해 광주에서 온몸으로 항쟁을 겪은 허갑순 시인은 이제 5월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들이 사라진 후
길모퉁이에 있는 빈집에는
뿌옇게 바랜 고무신이 댓돌 위에
놓여 있는 것 말고는 그가 안에 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지붕도 없고 대문도 없이
그렇게 견딘 세월이 텅 빈 거리 이곳저곳에서
깃발처럼 펄럭인다
…
5월의 아들딸들아 보고 싶구나
피어나서 하얗게 하얗게 꽃 천지로 번쩍여라
그대들이 자유 민주 평화 통일로 가는 길이었다
그대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수였느니
아직도 인권이 유린되고 폭력이 넘쳐나는
거리거리에 아름다운 손 편지를 부쳐주렴
세계 방방곡곡에 그대들의 소식을 전해주렴
그대들은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거듭났느니
…
날마다 꽃세상인데 그대들이 눈앞에서 번쩍인다.
- '그대들이 눈앞에서 번쩍인다' 中
◇ "정치꾼들의 시녀가 되지 않기를"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은 "날마다 꽃세상인데" 시인은 1980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대들이 눈앞에서 번쩍"입니다.
"길옆에 있는 빈집"의 댓돌 위 고무신의 주인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세월, "강산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시인은 그해 "5월의 아들딸들"이 "하얗게 하얗게 꽃 천지로 번쩍"이길 간절히 염원합니다.
5월 영령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수"로서 "자유 민주 평화 통일로 가는 길"이었음을 상기시킨 시인은 "아직도 인권이 유린되고 폭력이 넘쳐나는" 이 시대를 향해 외칩니다.
이들이 더 이상 "정치꾼들의 시녀"가 되지 않기를, "사기꾼들의 들러리"가 되지 않기를, "모사꾼들의 속임수"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외칩니다.
◇ 담양에 대한 정겨운 시적 이미지 구현허갑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담양가(潭陽歌)를 비롯한 담양에 대한 시적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고로 담양은 대나무로 유명한 곳입니다.
죽녹원이 아닐지라도 소쇄원 들어가는 길을 비롯해서 고을마다 대나무가 청청하게 솟아 있습니다.
담양은 죽향(竹鄕), 의향(義鄕), 그리고 가사 문학의 산실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빗소리가
댓잎을 때린다
천둥도 질펀하게
댓잎에 안긴다
빗소리가 스쳐 간 자리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푸른 구슬들이 똬리를
틀 때마다 작은 목소리들이
속삭인다
담양을 품으세요
조선시대의 담양을 들이세요
오래된 미래는 언제나 당신 편이에요
…
마음이 가난해서 슬픈 사람들 담양을
가만히 품어보세요
맑은 눈물 한 방울 대숲에 심어보세요
저리도 담양은 늘 푸른 희망이래요
- 지금 담양으로 오세요 中
"빗소리가 / 댓잎을" 때리고 "천둥도 질펀하게 / 댓잎에" 안기는 날, 시인은 빗소리가 스쳐 간 자리에서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그만큼 감흥에 젖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댓잎에 "똬리"를 튼 "푸른 구슬들"의 목소리, 곧 댓잎에 맺힌 빗방울들이 "담양을 품으세요" "조선시대의 담양을 들이세요" "지금, 담양으로 오세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특히 "마음이 가난해서 슬픈 사람들 담양을 / 가만히 품어보세요 / 맑은 눈물 한 방울 대숲에 심어보세요"라고, 투사의 기법으로 빗방울과 시인과의 동일화를 추구함으로써 시인이 곧 독자들에게 담양으로 오길 권유합니다.
◇ 현재 광주 YWCA 신협 상임 이사장으로 활동허형만 시인(목포대학교 명예교수)은 시 해설에서 "허갑순 시인의 시적 특성은 생명 정신과 사랑에 대한 천착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특성은 물론 지금까지의 시집 속에서 꾸준히 발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투명한 존재 의식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평했습니다.
한편, 허갑순 시인은 조선대학교, 동신대학교 외래교수, 한국연구재단 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광주 YWCA 신협 상임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