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_아빠의 남극일기(10)]남극에서 다시 마주한 420ppm의 경고

    작성 : 2025-10-11 09:00:01
    10년 만에 돌아온 세종기지, 녹아내리는 빙하와 묵묵히 버티는 사람들
    ▲ 아르헨티나 칼리니 기지 전경-세종기지와 직선으로 6km 떨어진 곳에 있다('25.05.31)

    남극은 북반구와 계절이 정반대다.

    이곳의 9월은 긴 한겨울이 끝나고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칠레, 중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기지가 모여 있는 필데스반도에서 10km 가량 떨어진 세종기지는 혹독한 날씨 때문에 겨우내 완전히 고립된다.

    뒤편 포터반도에 자리한 아르헨티나의 칼리니(Carlini) 기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두 기지는 모두 서로 다른 반도에 있고, 육로에는 크레바스가 가로막혀 있어 다른 기지로 가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겨울에는 바다가 얼어붙거나 유빙이 가득 들어차 이동이 쉽지 않다.

    지난 5월, 우리는 칼리니 기지를 찾아가 함께 식사하며 우정을 나눴다.

    그리고 얼마 전, 아르헨티나 대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물 연구에 필요한 증류수를 지원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세종기지에는 증류수를 생산하는 장비가 있어 흔쾌히 제공하겠다고 답했고, 칼리니 기지 대장은 증류수를 직접 받으러 오는 길에 대원들과 함께 방문해 교류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렇게 4개월 만에 우리 기지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왔다.

    ▲ 세종기지에 방문한 아르헨티나 칼리니 기지 대원들-칼리니 기지는 대부분 군인이 상주한다('25.09.18)

    아르헨티나 대원들은 선물을 가득 싣고 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서로의 선물을 주고받았다.

    점심은 조리장과 대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한식으로 대접했다.

    한식이 낯선 아르헨티나 대원들은 신기해하며 식사보다 사진 찍기에 더 바빴다.

    칼리니 대원들 중 영어를 하는 인원이 많지 않아 대화가 쉽진 않았지만, 스페인어를 공부 중인 우리 대원들이 통역을 맡아 분위기를 이끌었다.

    식사 뒤에는 체육관으로 자리를 옮겨 풋살 국가 대항전이 펼쳤다.

    사람들은 내 SNS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종종 단편적 정보와 선입견으로 평가한다.

    아르헨티나는 한때 우리보다 훨씬 잘살았지만 지금은 경제가 무너져 가난해졌고, 그래서 옷이 낡고 허름하다는 식이다.

    중국 기지 대원을 보면 간첩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들려온다.

    하지만 이곳에서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 대 사람으로 호의를 주고받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매일 얼음과 눈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 그리운 건 사람의 온기다.

    극지 연구와 기지 운영에 지장이 없는 한, 도움과 배려에는 국경이 없다.

    오히려 1년 내내 가족을 볼 수 없는 이곳에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다른 기지의 동료들이 더 큰 힘이 된다.

    그날 세종기지에는 오랜만에 웃음과 활기가 가득했다.

    겨울이 물러나고 여름이 다가오면 기지 주변에는 사람뿐 아니라 다시 생명이 돌아온다.

    남극도 따뜻해진 탓일까, 펭귄들의 번식 시기는 점점 빨라져 10월이면 기지에서 불과 2km 떨어진 펭귄 마을에 무리가 도착한다.

    ▲ 세종기지의 다양한 동물-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웨델 해표, 젠투펭귄, 게잡이 해표, 남극물개('25.09.21)

    그보다 앞선 9월에는 바닷물범과 물개들이 육지로 올라와 새끼를 낳는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올해 세종기지에는 유난히 눈보라가 잦았다.

    초속 15m가 넘는 강풍과 눈이 뒤엉켜 가시거리가 400m 이하로 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블리자드(Blizzard)’라 부른다.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블리자드는 기지 생활을 한층 더 고립시킨다.

    바람이 몰아치면 대원들은 실내에 갇혀 창밖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함이 쌓이고, 어느새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난다.

    그래서 남극은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살의 소중함을 깨닫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맑게 갠 하늘을 볼 수 있는 생활을 하다 보면, 왜 북유럽 사람들이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상의를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대기과학 연구원의 근무지는 생활관에서 빙하를 바라보며 약 1km를 걸어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기지에서 발생하는 각종 대기오염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순수한 남극의 대기를 관측해야 하기 때문이다.

    ▲ 대기 대원의 출근길 풍경-멀리 대기관측동 건물이 보인다('25.05.23)

    출근길에 빙하 앞을 지날 때면 갑자기 천둥 같은 굉음이 울리고, 이내 집채만 한 얼음덩어리가 부서져 바다로 떨어진다.

    세종기지가 자리한 킹조지섬은 남극에서도 기온이 가장 빠르게 오르는 지역 중 하나다.

    나는 이곳에서 대기과학 대원으로 두 번째 월동을 하고 있다.

    처음 왔던 10년 전과 비교해 빙벽이 훨씬 멀리 후퇴한 것을 매일 눈으로 확인한다.

    한국에서 볼 때는 단지 숫자였던 지구 대기의 탄소 농도와 기온 변화가, 여기서는 피부로 직접 와닿는다.

    빙하가 뒤로 물러날 때마다 누군가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스며든다.

    첫 월동 때 세종기지 대기관측실에서 이산화탄소 농도가 처음 400ppm을 넘은 화면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찾은 세종기지의 수치는 이미 420ppm을 훌쩍 넘어 있었다.

    현생 인류가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이렇게 높은 이산화탄소 농도 속에 살아본 적은 없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지구가 방출하는 열(복사에너지)이 대기 속에 머물며 온도를 끌어올린다.

    이는 남극의 빙하가 그만큼 더 빠르게 녹아내린다는 의미다.

    ▲ 마리안소만 빙하-빙하는 가까이서 보면 푸른 빛을 띈다('25.09.16)

    이곳 세종기지에서 바라보는 마리안소만 빙하 역시 해마다 수십 미터씩 부서지며 해안선이 뒤로 물러나고 있다.

    오랜 세월 눈이 쌓여 다져진 빙하는 멀리서 보면 온통 흰색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투명함부터 맑은 흰빛, 깊고 선명한 푸른빛까지 다양한 색을 띤다.

    특히 짙은 푸른색을 품은 거대한 빙하를 마주할 때면, 그 색 때문인지, 아니면 이 아름다움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아득한 연민 때문인지 저절로 눈가가 젖는다.

    이제 혹독한 계절이 저물어 간다.

    곧 바다에 고무보트를 띄우고 빙하를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 마리안소만-세종기지 맞은편 위버반도에서 내려다 본 풍경('25'09'10)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주, 녹아가는 빙하를 눈과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전하고 싶다.

    우리가 왜 탄소 사용을 줄이고 기온 상승을 막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남극기지 월동대원은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힘들어도 업무를 멈출 수 없다.

    각 분야를 단 한 사람이 맡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 발전기, 중장비, 통신, 조리, 의료, 기상 예보 등 어느 하나라도 공백이 생기면 기지 전체 운영이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지치고 우울해도 내색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낸다.

    평범한 직장처럼 휴가를 내어 쉬는 일도, 혼자 기분이 좋다고 늦은 시간까지 노래를 부르며 떠드는 일도 없다.

    이곳에서는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곧 생존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은 표정과 발걸음에 묻어난다.

    어떤 대원은 가족 소식에 마음이 무겁고, 어떤 대원은 몸이 좋지 않아 힘겨워한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내며 일하고,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보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서로의 마음을 읽게 된다.

    이제 세종기지의 겨울 끝자락, 9월이 지났다.

    내색하지 않고 버텨 왔지만 모두가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왔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남극을 떠나기까지 두 달 남짓.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나아가고 있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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