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이]'황금사과' 조각가 정춘표..금봉산 기슭, 가장 빛나는 조형예술(1편)

    작성 : 2024-11-23 09:00:01
    20년 전 신촌동에 작업실 마련 작품 전념
    정통 구상 조각에서 설치 작업으로 전환
    '북어와 새', '황금사과' 시그니처 구상
    육아와 작품활동 녹록지 않은 삶의 궤적
    [남·별·이]'황금사과' 조각가 정춘표..금봉산 기슭, 가장 빛나는 조형예술(1편)

    '남도인 별난 이야기(남·별·이)'는 남도 땅에 뿌리 내린 한 떨기 들꽃처럼 소박하지만 향기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남다른 끼와 열정으로, 이웃과 사회에 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광주·전남 사람들의 황톳빛 이야기가 채워질 것입니다. <편집자 주>

    ▲공방에서 포즈를 취한 정춘표 조각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촌동 금봉산 끝자락에 '아트 갤러리' 건물이 눈길을 끕니다.

    약 40년 세월을 조각가로 살아온 정춘표 작가의 작업실입니다.

    작가는 30대 후반 이곳에 들어와 20년째 오로지 작품에만 집중하며 한 계단 한 계단 예술가로서 커리어를 쌓아왔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1층 공방이 정돈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작업할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완성된 작품 몇 점 그리고 스텝의 책상이 한 공간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광산구 신촌동 '아트 갤러리' 전경


    작가의 안내로 2층 전시실 겸 거실로 이동했습니다.

    창밖으로부터 금봉산의 가을빛이 가득 스며들었습니다.

    갤러리처럼 꾸며진 전시실에는 작가가 제작한 작품들이 저마다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 조선대 미대와 동 대학원 졸업
    정춘표 작가는 조선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줄곧 조각가로 살아왔습니다.

    돌아보면 여자로서 가정을 꾸리며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의 궤적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슈퍼우먼'이 돼야 했습니다.

    결혼 후 처음에는 광주사직공원 내 팔각정에 있는 광주창작 미술공방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셋으로 불어나자 친정과 가까운 서구 내방동 빌라로 이사해 단지 내 반지하건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육아와 작품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2년마다 한 번씩 전시를 하기 때문에 날마다 몰딩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아침에 두 아이를 학교와 놀이방에 보내고 셋째 갓난아이를 돌보며 빨래와 청소, 음식 장만 등 집안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저녁밥 먹이고 저녁 8시 반이 넘어 남편이 퇴근하면 그때서야 작업실로 내려갔습니다.

    몰딩 작업은 속칭 '노가다'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라인더로 깎고 다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분진이 공사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게다가 포마이카 도료는 휘발성이 강하고 독한 냄새로 인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2024 서울모던아트쇼 정춘표 조각가 포스터

    그래도 전시를 위해 작업을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때때로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엄마를 찾아 반지하실을 들락거렸습니다.

    먼지 투성이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땅바닥에 앉아서 짜장면을 시켜서 아이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전시 일정이 촉박한 날에는 갓난아기를 업고 밤새 작업을 하다가 날이 훤히 밝아오기도 했습니다.
    ◇ 2년에 한 번씩 꾸준히 전시
    그렇게 작업을 해서 2년에 한 번씩 꾸준히 전시를 이어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작품을 만들어놓으면 금세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광주, 서울, 부산 전국 순회 전시와 프랑스 파리 등 해외 전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작업과정에서 발생하는 FRP, 포마이카 냄새와 샌드그라인더 소음, 그리고 비산먼지로 주민민원이 들어와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그럴 땐 하는 수 없이 승용차에다가 석고와 몰드, 반죽통 등을 트렁크에 싣고 모교인 조선대에 가서 작업을 했습니다.

    때때로 일정이 다급해서 빌라 단지 내에서 몰래 작업하다가 보면 또 다시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2000년도에 시내 변두리에 작업실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좀 잘 나가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작가들은 담양, 화순에 작업실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아이들 육아 때문에 집과 가까운 시내 언저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스태프를 통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결과 지금의 소촌동 광주경찰청 앞과 현재 신촌동 작업실 부지 두 군데를 골라왔습니다.
    ◇ 땅값 안 올라도 작업에는 최적 장소

    고민 끝에 장갑 공장이 있던 지금의 자리를 택했습니다. 골목길 건너 금봉산 자락에는 허허벌판에 감나무 몇 그루와 묏동이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창고들도 듬성듬성 있었으며 마치 슬럼가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작업에만 초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만약에 광주경찰청 앞 땅을 샀더라면 땅값이 많이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곳을 안 사고 지금의 자리를 고른 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새벽 1~2시, 혹은 새벽 4시까지 작업을 하다가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여름에는 열대야로 땀이 등에 송골송골 맺혔지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반바지를 입고 작업을 했습니다.

    작가가 여기에서 20년의 세월을 머무는 동안 작품 경향도 사뭇 변했습니다.

    초기작품은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작가만의 해석이 담긴 인체 조형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습니다.

    "기존 구상 조각가들과 차별화된 여체(女體)를 제가 형성했었죠. 여체에 꽃을 넣어서 향기를 넣고, 바람을 넣어서 촉각을 건드리고, 그 다음에 새를 올리면서 청각을 두드리고 이런 오감을 두드리는 여체 작업을 했습니다."

    ▲서울모던아트쇼 전시장에 선보인 '황금사과'

    ◇ 천경자와 이중섭의 색깔 담겨
    그런데 2000년도가 되면서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인체 조각은 퇴조하고 설치미술과 비디오 아트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브제가 들어오고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세계적인 미술 사조가 형성되면서 옛날 아카데믹한 정통 구상 작업이 파괴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나의 색깔을 가진 설치 작업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게 나의 시그니처 새를 가지고 가면서 복을 부르는 북어로 전향을 하고 2004년 프랑스 파리 북어전을 했습니다."

    그 작업이 또 몇 년 흐르다 보니까 공간 해석 방법에 대한 포괄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서 현재의 '사과와 새'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끊임없이 작업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전시장을 다녀보고 국제적 흐름과 미술 사조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좀 더 진화되고 이렇게 차츰 변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나의 색깔과 나의 작품성과 요즘 미술사적인 발전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해석들이 나도 모르게 변해가는 거죠."

    작가는 지난 10월 서울 모던아트쇼와 광주아트페어에서 '황금사과', '빨간 사과', '북어와 새'를 선보였습니다.

    작가의 시그니처인 여인과 새, 북어, 사과는 '꿈, 자유, 평화, 이상'입니다.

    그리고 천경자의 색깔과 이중섭의 색깔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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