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이름 때문에 운명이 바뀐 ‘광주 탁 씨’

    작성 : 2025-06-20 09:06:03
    김종 교수, 사서 근거 '광주 탁 씨' 환란 조명
    "중시조 탁광무 '호남' 명칭 최초 언급"
    "호남 최초 정자 '경렴정' 복원 서둘러야"
    ▲ 제2회 경렴정 학술대회 장면 

    광주광역시를 관향으로 하는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인 '광주 탁 씨'의 내력과 흥망성쇠, 그리고 주요 역사 인물을 조명하는 학술 행사가 열렸습니다.

    광주유학대학 호남유학연구소는 19일 광주향교 유림회관 2층에서 '제2회 경렴정 학술대회'를 열고 '광주 탁 씨' 문중 변천 과정과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고찰했습니다.

    이날 발제로는 김종 경렴정복원추진위원장(전 조선대 교수)의 동사강목에서 탁성피휘(卓姓避諱)를 읽다,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의 경렴정 탁광무의 생애와 사상, 기세규 광주유학대학 교수의 경렴정 탁광무의 유학 사상 고찰이 발표됐습니다.
    ◇ '광주 탁 씨'의 흥망성쇠에 얽힌 비화
    이 가운데 김종 교수는 조선시대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언급된 '탁성피휘(卓姓避諱)'를 근간으로 '광주 탁 씨'의 흥망성쇠에 얽힌 비화(祕話)를 이끌어내 관심을 모았습니다.

    김 교수는 『동사강목』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려 20대 임금 신종(재위 1211-1223년)이 이름을 '탁(晫)'으로 개명하면서 탁성(卓姓)을 가진 모든 사람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하고, 내외(內外)의 성이 같으면 내외가 조모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왕의 이름 때문에 성씨를 바꾸어야 했던 광주 탁 씨 문중으로선 '환란의 개막'이었다"고 적시했습니다.

    이어 "1930년 국세조사에서 탁씨의 총원이 2,403호로 성씨별 순위가 76위였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2만 1,09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의 성씨 가운데 92위로 이전보다 더 밀린 상황임을 알 수 있다"며 "한번 꺾인 성씨의 숫자는 후대에 와서도 회복되거나 불어나지를 못하고 계속 '희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 중시조 탁광무, 모함받아 광주로 낙향
    결국 광주 탁 씨는 시조 탁지엽 이래 명문거족으로 그 흐름을 이어갔으나, 돌연 한미(寒微)한 성받이로 바뀐 것에 대하여 그 엄청난 비밀을 『동사강목』 '탁성피휘(卓姓避諱)'에서 찾은 것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했습니다.

    김 교수는 광주 탁 씨 중시조(中始祖)인 경렴정 탁광무(1330-1410)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議)를 지낸 탁광무는 신돈 일파의 전횡에 맞서다가 모함을 받아 광주로 낙향하는데, 승려 천인의 시에 '호남(湖南)'이 사용된 예가 알려지기 전까지 그가 최초로 '호남'이란 지명을 사용했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탁광무는 연못을 파서 작은 섬을 만들어 그 위에 '경렴정'이란 정자를 짓고 말년을 보냈는데, 이는 광주권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누정으로 알려졌습니다.
    ◇ 경렴정 위치, 운천저수지 인근 추정
    경렴정 위치에 대해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광주보훈병원 자리라는 설과 서구 쌍촌동 운천저수지(일명 서호) 인근이라는 설 등이 존재하는 가운데, 후손 탁인석 씨(전 광주대 교수)는 운천저수지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종 교수는 "탁광무 선생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에다 '호남'이란 표현이나 우리 지역에 정자(亭子) 문화를 연 업적만으로도 가장 호남적이고 가장 광주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아울러, "이번 학술대회 성과를 근거로 광주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경렴정 복원을 서두를 방침이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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