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광주 발산마을 찾은 '서울 청년' 이정식 작가

    작성 : 2025-02-21 09:35:40
    연말까지 머물면서 프로젝트와 작품 활동
    드로잉, 설치미술, 영상까지 다양한 작업
    남다른 성장기…독특한 작업 방식과 예술세계
    "광주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상흔"
    ▲ 커뮤니티센터 옥상에서 발산마을을 바라보는 이정식 작가

    "여공들의 삶이 스며 있는 공간에 편입되는 기분"

    광주광역시의 오랜 달동네 서구 발산마을에 서울에서 활동하는 30대 이정식 작가가 내려왔습니다. 

    발산마을은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의 성지로 탈바꿈했는데, 그가 공유공간 뽕뽕브릿지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한 것입니다. 

    그는 글쓰기를 기반으로 회화, 설치미술, 영상까지 다양하게 작업을 하는 '멀티' 작가입니다.

    2월 초 눈이 내리던 날 이삿짐을 챙겨 광주 땅을 밟은 그를 발산마을 커뮤니티센터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올해 연말까지 머물면서 판화와 영상 작업, 그리고 기획자로서 광주 예술단체 '마리모'로부터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17살 때 심한 사춘기 겪으며 홀로 상경
    올해 38살인 이정식 작가는 여느 작가와는 다른 성장 환경과 교육과정을 거쳤습니다. 

    1987년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17살 때 사춘기를 심하게 겪으며 가족 품을 떠나 홀로 서울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청소년쉼터와 고시원을 떠돌며 배고픔을 견디며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극작가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 이정식 작가의 조각 작품

    이후 홍대 주변을 맴돌며 전시, 공연을 관람하고, 젊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무렵 퍼포먼스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흑표범' 작가를 알게 돼 가족처럼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합니다. 

    '흑표범' 작가는 옛 전남도청 광장에서도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술적 안목을 키우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또한 문학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해 시와 소설, 희곡을 읽으며 글쓰기 능력을 키웠습니다.

    그는 당시 안톤 체홉의 '벚꽃 동산' 등 많은 희곡을 읽었는데,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 작품활동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배고픈 예술만을 좇을 수 없어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여러 시민사회단체를 거치면서 폭넓은 사회적 안목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 다큐 '김군'을 제작한 강상우 감독과 인연
    그 과정에서 그는 5.18 다큐멘터리 '김군'을 제작한 강상우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2013년 극영화 형식의 '샘솟는 기쁨'을 제작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남다른 성장기를 거친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와 작업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강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정식 작가와의 일문일답.

    Q. 그동안 가진 개인전의 주제는?

    2017년 《nothing》이란 주제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약 먹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 복용한 시간을 기록한 시리즈, 약을 녹여 바른 시리즈, 저의 개인적 경험을 담은 종이 기록물을 파쇄하면서 낭독하는 영상 작품 <그 책>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2018년 두 번째 개인전 《김무명》에서는 2013년 한 요양병원의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고 김무명씨의 추모식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장례식장에서도 '무명'으로 기록된 고인을 보고 영감을 얻어 동명의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2020년 세 번째 전시는 저의 이름을 딴 《이정식》으로 저 자신의 경험과 작품을 재해석하고자 했습니다. 

    ▲ 발산마을 골목길 이정표

    ◇ 낙후된 동네, 서민층 삶의 익숙한 경험 소환
    Q. 발산마을의 공간적 느낌은?

    쇠락한 달동네에서 살았던 여공들의 역사가 스며 있는 공간에 편입되는 기분입니다.

    제가 유년 시절을 대전 동구 용운동 일대에서 보냈는데 좁은 골목길과 연탄아궁이를 사용하는 낡은 집 사글셋방을 전전했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또한 서울에서도 용산 해방촌 낙후된 동네에서 살면서 서민층 삶의 익숙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개발로 인해 부서지고 변화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묘한 서글픔과 연민의 정이 솟아납니다.

    서대전 호수돈여고 부근의 오래된 건물들이 재개발로 사라졌는데, 공간에 대한 기억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Q. 발산에서 하루의 일과는?

    주로 밤에 작업하는 편이라 오전 늦은 시간에 일어나 커뮤니티센터 카페에서 책을 읽고, 동네 주변을 산책하는 게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걷기를 즐겨 하는데 내일은 충장로까지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주말에는 장애인활동지원사로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토·일요일 이틀간 장애인을 대상으로 신체·가사활동을 지원하면서 수입을 얻습니다. 

    항상 고립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밥은 안 굶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정식 작가의 영상작품

    ◇ "할머니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듣고 싶어"
    Q. 발산마을에 머무는 동안 작품 활동 계획은?

    과거에 군 사고(事故) 유가족 지원활동을 하면서 어머니들을 만나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이곳에서도 '동네 할머니'들을 많이 만나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들의 인생 스토리보다는 표정과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에 대해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Q. 예술단체로부터 의뢰받은 프로젝트 진행은?

    광주 예술단체 <마리모>로부터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옛 월산파출소에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광주문화재단 창작공간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로 「마지막 책」이라는 주제로 문학작가 3명과 시각예술가 3명을 선정해 작업실을 지원하고, 서로의 삶을 알아가며 생성되는 밀도를 높여가면서 작가들의 협업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책」이라는 제목은 사람들의 관계나 어떤 만남, 창작자의 작업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실패를 드러내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 붙인 제목입니다. 

    실패를 긍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건 그래도 예술의 기능 중 한 가지가 인간을 사랑으로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는 6월에 작가역량 강화사업 프로그램으로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의 저자 김은정 선생님을 초대해 대담을 나눌 계획입니다. 

    또한 문학작가 3명과 시민을 시각예술가 3명의 협업 과정을 기록하면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낭독회와 전시를 열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마지막 책'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 이정식 작가의 설치미술

    ◇ 네 번째 개인전 《두 사람》 준비 병행
    Q. 또 다른 작업 계획은?

    마리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하반기에 열릴 제 네 번째 개인전 《두 사람》 준비를 위한 작업도 병행할 예정입니다. 

    조현병을 앓은 두 친구에 대한 저의 사적인 기억으로 질병으로 인해 관계의 수평이 무너지고 멀어진 그들에 대한 저의 기억을 꺼내 시각의 형태로 가공합니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했던 '그'와의 기억과 기록이자 나와 분리된 세계에 남아버린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감정들이 남긴 감각을 재현하면서 내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던 세계의 한 공간을 전시의 형태로 소환하고자 합니다. 

    3월부터는 광주극장 골목책방 '소년의 서' 임인자 대표를 드라마터그로 모시고 대본을 작성하면서 광주에서 활동하는 연극배우를 섭외해 독백극을 영상으로 촬영할 예정입니다.
    ◇ "『소년이 온다』 읽고 5·18에 대해 깊이 생각"
    Q. 끝으로 광주에 대한 생각은?

    광주를 여러 차례 오가면서 자연스레 5·18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특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소년이 온다』를 읽고 5·18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옛 전남도청 앞을 지나면서 '그 당시 역사적 현장을 피해 숨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은 지금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라는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비극을 빨리 잊어버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는데 상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인 것인지, 인간의 사유 능력이 작동하기를 멈춰버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남도청 앞에 서서 한참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5·18을 직접 겪었던 이들의 아픔과 그들의 아픔을 옆에서 비켜서서 경험하고 체화해야 했던 이들을 지나 지금의 아이들은 지금 여기 이곳 광주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광주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희미해져 가는 아픔의 흔적입니다.

    어쩌면 저는 광주에서도 옅은 회색, 회색지대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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