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_아빠의 남극일기(4)]모두 부러워하는 남극의 슈퍼스타 '세종과학기지', 하지만..

    작성 : 2025-04-12 09:00:02
    최고의 연구시설과 최신식 숙소 갖춰 주변 국가의 부러움 한 몸에
    하지만 점점 줄어드는 지원에 연구원들 한숨
    우리나라와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 남극 킹조지섬에 약 20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있다. 올해로 벌써 38년째에 접어드는 바로 남극세종과학기지다. 세상과의 고립을 자처한 이곳에선 연구원과 기술자, 의사, 요리사 등 분야별로 선발된 월동대원들이 갖은 우여곡절 속에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길고도 짧지 않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대기과학연구원'의 일상을 이어갈 아빠의 삶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편집자주>

    ▲킹조지 섬 전경(여러 나라의 기지가 모여 있고, 크루즈 관광객이 많아 남극의 맨해튼이라 불린다)

    남극세종과학기지가 있는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은 오래전부터 '남극의 맨해튼(Manhattan)'으로 불릴 만큼 남극에서는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이 섬에는 세종기지를 비롯해 러시아, 칠레, 중국,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 페루 등 9개 나라에서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기지를 운영하는 대원뿐만 아니라 이곳은 남미 대륙과 가깝기 때문에 남극대륙 기지로 이동하는 연구원과 남극을 여행하는 관광객이 1차로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킹조지섬은 날씨가 혹독한 동절기를 제외하곤 늘 사람으로 붐비는 곳이다.

    ▲(위) 러시아 기지 전경(1968년에 지어졌다), (아래) 중국 기지 전경(1985년에 지어졌다)

    1968년에 러시아의 벨링스하우젠(Bellingshausen) 기지를 시작으로 1969년에는 칠레의 프레이(Frei Montalva) 공군기지, 1985년에는 중국의 장성(Great Wall) 기지가 지어졌고, 세종기지는 1988년 2월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내가 첫 월동을 할 때인 2015년 세종기지를 방문한 중국 장성기지 대장과 대원들에게 기지를 소개할 때였다.

    당시 기지에는 출고된 지 20년이 훌쩍 넘어 여기저기 고장 난 트럭이 있었는데 문에 노끈을 단 채 여닫아야 했던 트럭을 본 중국 대원들이 한참을 웃었고, 나도 함께 머쓱하게 웃어넘긴 일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당시 본관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지은 지 30년 가까이 지나 곳곳에 녹이 슬고 부서져 아주 허름해 보였다.

    당시에도 한류의 영향으로 기지에 방문한 외국인들은 우리를 만나면 관심을 보이고 좋아했지만, 세종기지만큼은 킹조지섬에서도 그저 그런 대접을 받았었다.

    반대로 내가 중국 장성 기지를 방문 했을 적 느낀 기분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종기지의 온실을 보고 '남극에서도 채소를 키워서 먹다니 대단하다'라고 혼자 뿌듯해하며 중국 기지 대원들에게 자랑했었는데, 나중에 중국기지에 방문해 그들의 온실을 보곤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세종기지 온실에서 키우던 채소는 상추와 깻잎 등 엽채소가 대부분이었지만, 중국기지 온실에서는 오이와 수박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다른 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세종기지엔 폭설이 내릴 때마다 중장비로 제설작업을 하지 않으면 운행 가능한 차량이라고는 대형차인 설상차 밖에 없어 연구원들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중국은 겨울철 폭설에도 궤도바퀴를 달아 승용차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었고, 그것도 모두 최신의 일본산 차량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우연찮은 기회로 다시 세종기지에 와보니,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남극은 12월이 여름이라곤 하지만 예전보다 기온이 올라 기지 주변에서 눈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변화였고, 그 다음으로 큰 변화는 본관 건물 뒤편에 자리 잡은 아주 커다란 연구동 건물이었다.

    연구동 건물은 크기뿐만 아니라 잘 갖춰진 편의시설 면에서도 10년 전과는 아주 큰 차이를 느끼게 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 연구시설과 사무실, 숙소를 둘러본 나는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세종기지 연구시설(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연구동 건물, 연구실, 휴게실, 연구원 숙소)

    남극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아니, 국내에 지어진 웬만한 연구시설에 견주어도 나무랄 데 없을 만큼 훌륭했다.

    상대적으로 날씨가 온화한 12월부터 2월은 많은 연구원들이 기지에 방문한다.

    여기에는 국내 연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연구원도 참여하곤 하는데 올해에는 칠레, 세르비아,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인도 등 6개 나라에서 다양한 분야의 극지연구를 위해 세종기지에 방문했다.

    나는 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으로서 그들에게 불편한 게 있는지 수시로 물어봤지만, 그때마다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킹조지섬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을 갖춘 기지는?'

    만약 누군가 킹조지섬에서 연구 중인 외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단연코 대답은 하나일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의 '남극세종과학기지'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얼마 전 러시아 벨링스하우젠 기지의 대원들이 우리 기지에 방문한 적이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기지를 소개하다 마지막으로 기지역사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건물은 세종기지가 처음 지어진 1988년에 만든 건물로 현재는 내부를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위) 세종기지 박물관 건물(1988년에 지어졌다), (아래) 세종기지의 과거 하계연구원 숙소(8년 전까지 이 숙소를 사용했다)

    과거 월동대원들의 의류와 연구물품,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고 당시 숙소도 그대로 전시해 두었다.

    그때 박물관 전시물을 둘러보다 숙소를 본 러시아 기지 대장이 이렇게 말했다.

    "아직 훌륭한데요?"

    그리고 러시아 기지의 다른 대원이 대장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도 박물관에 살고 있어요."

    지금 러시아 기지의 숙소가 세종기지에서 박물관으로 전시해 놓은 숙소상태와 비슷하다는 얘기였다.

    ▲세종기지를 견학중인 러시아 기지 대원들

    우리 대원뿐만 아니라 러시아 대원과도 유쾌하게 웃어넘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고 나는 세종기지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또 한 번은 우루과이의 아르티가스(Artigas) 기지 창립 40주년 행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화장실 문고리가 모두 빠져있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이곳은 문명의 세계와 동떨어져 있어 전기 생산부터 각종 기계설비의 수리 등 크고 작은 시설물 보수도 모두 기지 대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건 세종기지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기지가 똑같은 처지이다.

    그렇다보니 부족한 자재와 기술로 인해 대부분 기지의 시설물은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오랫동안 방치 된 곳이 많이 있다.

    하지만, 세종기지만은 예외이다.

    웬만한 시설물은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월동대원이 바로 출동해 해결하는 덕분에 시설물이 낡은 곳은 있을지언정 고장 난 채 방치된 시설은 거의 전무하다.

    하루는 페루의 극지과학 연구선이 세종기지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배에는 약 80여 명의 페루 해군, 과학자와 함께 반가운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해군에서 파견된 현역 조영일 소령이었다.

    30여 명의 페루인과 함께 기지에 방문한 조영일 소령은 기지를 둘러보며 시종일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기지를 떠나기 전 가슴 벅찬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세종기지 대장(우측 아래에서 2번째, 김원준)과 환담 중인 페루 해군 군인들 그리고 우리나라 해군 조영일 소령(우측 맨 아래)

    "지금껏 방문한 기지 중에 최고에요! 시설도 그렇고 잘 관리되고 있는 게 정말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이 느껴집니다. 최신 건물보다도 모든 시설물이 잘 관리되고 있는 게 더 인상 깊네요. 월동대 여러분,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10년 전의 세종기지와 지금의 세종기지는 몇 사례만 들어 설명하기에도 이 정도의 위상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잘 갖춰진 시설, 그리고 기지 관리 상태와 달리 남극 연구원들에 대한 지원에는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기지에서 먹고 생활하는 식재료는 9월경 국내에서 컨테이너에 한 번에 실어 세종기지로 보낸다.

    그러면 월동대가 이 1년 치 식재료를 창고와 냉동고에 보관하고 조리대원은 연말까지 재고를 관리하며 대원들을 위해 요리를 한다.

    하지만, 이곳은 모든 식재료를 오랫동안 보관하며 먹기 때문에 보관중인 식품이 상하기라도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디에 가서 바로 구매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과거에는 식재료 같은 경우 조금 남더라도 여유 있게 보급하는 게 당연시 되었었다.

    비록 냉동식품이나 라면 같은 건조식품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그래도 기지에는 월동대원이 연말까지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부터 라면 양을 조절하며 배분해야 할 만큼 모든 식재료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라면 같은 간식은 평소 한국에서는 거들떠도 안 봤었는데, 이곳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하계기간에는 많은 하계 연구원들로부터 '아끼다 똥 된다'는 소리와 함께 지원 좀 많이 해달라는 원성을 들으면서도 월동대 총무님(황의현)은 나중을 생각해 최대한 아끼곤 했었다.

    ▲남극에서 야외활동 중 먹는 라면(추운 곳에서 활동하려면 차갑게 식은 밥보다도 때로는 따뜻한 음식이 더 도움이 된다)

    그런데 아직 월동이 아홉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이것저것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게 지금 남극 킹조지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세종기지의 현실이다.

    과학기술 분야의 예산이 삭감되면 현장에서는 어떤 변화가 발생하는지 우리 월동연구대는 이역만리 남극에서 하루하루 직접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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