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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그림을 흔히 `남종 산수화'로 부른다. 덧붙여 문기(文氣) 흐르는 격있는 그림으로 여겨왔다.
그림을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누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남(南)쪽과 북(北)쪽을 가리는 지리적 구분과는 다르다. 남종화는 문인 사대부가 즐겨 그린 그림을, 북종화는 신분이 낮은 직업화가인 화원들이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우리의 선조들도 일부 이런 의미의 그림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다.
한민족의 민족문화 중흥기였던 조선시대에 크게 융성한 회화는 이를 반영하였다. 특히 그림은 선비 유생들을 중심으로 당대인의 교양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양반으로 문인 사대부라면 응당 시(詩)·서(書) ·화(畵)에 능함은 큰 덕목이었다.
이들은 매·난·국·죽의 사군자를 치고 시를 지어 풍류를 즐기는 그야말로 당대의 문인 사대부들었으니 그림을 보는 안목이나 학식, 교양과 덕행이 한가지였다.
바로 이런 양반 사대부 집안의 문인(文人)이 그린 그림을 `문인화'라 칭한 것에서 연유한다.
문인이라면 앞서 말한대로 양반 사대부이니 당연히 그런 양반의 정신을 담아 그린 그림이어서 `남종화'라 부를 만 했다.
반면 `북종화'는 사대부가 아닌 직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일렀다. 직업 화가를 `화원'으로 불렀다. 이들은 대게 신분이 낮아 마음대로 입신할 수 없었다.
화원은 궁중이나 나라의 필요에 의한 관수용 그림을 주로 그렸다. 우리나라도 이런 화원들을 국가가 양성하기 위해 삼국시대의 `채전', 고려시대의 `도화원', 조선시대의 `도화서'를 설치해 운영했다.
도화서 출신의 화원으로 김홍도나, 신윤복, 장승업 등 우리가 잘 아는 화가들이 이들이다.
그러나 김홍도는 왕의 총애를 받아 만년에 경상도 현풍현감으로 부임, 관직에 오르며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남길 정도였다.
이처럼 전통 회화사에는 시대의 정신은 물론 이데올로기와 철학, 사상, 계급이 그대로 담기기 마련이다.
남도에 양반 계급이 즐겨 그린 남종 산수화가 유행하게 된 것은 이 고장이 한양과 먼 유배지였던 것도 한 이유이다.
호남 최초의 화가로 불리는 학포 양팽손을 비롯 공재 윤두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양용 등 당대 걸출한 학자와 문인 사대부들이 남도의 산수에 파묻혀 그림을 그렸다.
이들 중에는 조정의 노여움을 사 남도로 유배 내려와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뿌린 씨가 ‘남종화’로 발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남도의 화가들은 수묵의 정신과 그것이 품는 격조, 아취를 대단히 고귀하게 여기며 이를 이어받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지금은 신분 계급이나 화원이 따로 있지 않지만 그림에 담는 인격과 화격은 여전하여 남도 문인화의 정신만은 꼿꼿히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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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오랜만에 원로화백 A씨의 전화를 받았다. 너무 오랜만의 통화라 인부인사가 자연히 길어졌다. 당연히 과거 기억들이 소환되고 한 10분이 그냥 스쳐갔다.
그는 전에도 종종 연락을 먼저 해 오곤하여 전화를 받으면 더 적극적인 응대를 하게 된다. 잊을만하면 전화하여 안부를 묻고 자신의 화업에 대해 풀어 놓는다.
이번에도 그는 과거 즐겁고 좋았던 추억들을 한소쿠리 내 앞에 퍼부어 놓았다. 자신이 예술단체의 사무 책임자일 때 보람찼던 일들을 끄집어냈다.
특히 신인작가 발굴을 위한 미술 공모전과 관련하여 지금도 그때 발굴한 후배 제자들이 열심히 작업하고 전시하고 활동하는 모습만 봐도 즐겁다는 것이다.
A화백과 대화를 하다보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소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하다고 할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그와의 통화나 대화가 나도 편하고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먹을 갈고 물감을 풀어 하얀 화선지를 채워나가는 것이 흡사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싶다.
그는 젊은 시절 신문사에서 일 했고 퇴임 후 문화예술 단체에서 실무 일을 도맡아 하며 화실을 운영했다.
자신의 고향 솔밭을 그리며 자기 나름의 세계를, 정신을 펼쳐 보이려 하였었다. 화가라면 ‘문기 흐르는 그림’의 제 세상을 열어 보이려는 끊임없는 정진을 한 셈이다.
그런 그였지만 세태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누가 그림 한 점 사주는 사람이 없다”고 아쉬움을 종종 토로했었다.
이번에는 그런 탄식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평생 붓을 잡아온 한 사람의 화가로서 숨은 한숨이 있었지 않았을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좌표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한 흐려진 일상 때문에 과거를 회상하는 것일 거다.
거기에 나와 함께 했던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그는 추억의 서랍장을 뒤져 꺼내 보려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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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예술이 시들어 가고 있다. 아니 말라버렸다. 혹자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지난 초봄에 지역 미술단체 관계자들을 만나 안타깝다 못해 참담한 실상을 들어야했다.
이 단체가 주관하는 정통 미술공모전의 예산이 갈수록 줄어들어 신인발굴의 취지를 살리기에도 퍽퍽하다는 것이다.
올해도 예산을 대폭 줄어 어떻게 살려볼 도리가 없을까 고민 중이었다. 예산이란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는 것인 만큼 삭감되기 전에 손을 써야하는 게 일반적이다.
경험도 줄도 뭣도 없는 예술가들에겐 그저 주어진 범위 내에서 행사를 치러야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지역 최고의 공모전이 초라하게 쪼그라들어 겨우 명맥만 이어가는 꼴이 되고 있다는 '또 다른 탄식'이 나왔다.
때문에 지원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부문은 대상을 주고, 작품 수가 적은 부문은 작품성과 관계없이 대상 수상자를 뽑지 못하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특히 한국화 문인화 등 전통 수묵화 계열의 경우는 갈수록 심각하다고 했다.
각 대학의 미술 전공학과의 폐지가 줄을 잇고 있고 동호회나 취미반 역시도 경기침체와 참가자 수가 줄어 신인 공모전에 나서는 이가 말라버린 것이다.
이미 대학사회에서 예술교육은 뒤로 밀려나고 취업 위주로 모든 과정과 역량이 모아진지 오래다.
문화와 예술 전공의 경우는 대책 없이 고사위기를 맞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게 현장의 목소리다.
비단 공모전만의 일이 아니다. 이렇듯 예술의 위기를 눈앞에 두고 “문기 흐르는 그림”이나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입버릇처럼 외쳤던 과거의 '문화예술발전 중장기 계획'은 죄다 어디로 갔기에 오늘날 이렇듯 예술인이 고통받는 건가.
한 때 ‘아시아의 문화수도를 지향했던 도시’의 현실이 이렇다니 답답할 뿐이다.
아시아문화전당을 지어 놓고, 문화 발전의 전진기지라고 떠들어 놓고서는 예술이 이처럼 말라가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려는지 묻는다.
한쪽에는 수백억 예산 쏟아 붇고도 적자에 허덕이는 그 길섶에서 예술 인재는 고갈되고 지역예술계는 쇠락의 길을 걷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예향 광주’, ‘문화수도 광주’의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이제 와 어떻게 할 건가. 누가 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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