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봉마을은 충절의 고을답게 입구에 비석과 기념비가 세워져 유서 깊은 마을의 내력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편으로 커다란 당산나무와 2층 누각이 자리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안내를 맡아준 이 마을주민 양동복(전 화순군의회 부의장) 씨는 "양 씨와 정 씨가 절반 비율로 살던 곳으로 한때 2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50호에 주민 7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과거엔 "청풍면장 할래, 쌍봉이장 할래 물으면 쌍봉이장하겠다고 할 정도로 마을 위세가 대단했었다"고 회고하며 "양향자 전 국회의원이 이 마을 출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북적거리던 옛 시절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번성했던 모습을 짐작게 합니다.

◇ 면장도 부러워 한 쌍봉이장의 '위세'마을 입구 당산나무가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마당은 원래 초등학교 분교가 있던 운동장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차장과 재활용품 배출장소로 쓰이고 있는데, 한 켠에 놓여진 녹슨 농구 골대가 학생들의 함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학포당으로 가는 마을 길을 따라 걷다보니 공회당 같은 건물에 '마을수퍼'라고 쓰인 문구가 보입니다.
정 씨는 "이 건물은 원래 마을회관이었는데 한 사업자가 옆에 회관을 신축해 주고 슈퍼를 운영했으나 오래전 폐업한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방앗간 건물이 벽체가 반쯤 허물어진 채 세월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내부 구조물들은 내려앉아 있고 허공에 녹슨 쇠바퀴만 걸려 있어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 씨는 자신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 방앗간을 운영했으나 대형 미곡처리장이 생기면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중단했다고 설명했습니다.
◇ 북적이던 학교와 방앗간도 흔적만 남아인구 감소에 따른 마을 공동화 현상을 쌍봉마을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양 씨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덧 양팽손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재인 학포당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안내로 학포당을 둘러보았습니다.
현재의 학포당은 양팽손이 쓰던 당시의 건물이 중간에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20년에 후손들이 현 위치에 복원한 것입니다.

학포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각지붕으로 꾸몄습니다.
경내에는 학포당을 창건할 당시에 양팽손의 둘째 아들 응태가 심었다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8형제를 상징하듯 8개 가지를 뻗치고 있습니다.
매년 은행 열매가 풍성하게 열려 과거에는 열매를 팔아서 제수비용으로 썼다고 합니다.
건물 옆에는 옛 터를 말해주는 '학포당유지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기념관 건립하려 했으나 무산 아쉬움정 씨는 "학포 기념관을 건립하려 했으나 유물·유품이 거의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대해 함께 동행한 양동률 화순문협 회장은 "쌍봉마을 출신 양팽손, 양회일 선생의 고귀한 충의정신을 문학에 담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한편, 양팽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11년(1516) 과거에 급제한 후 정언을 거쳐 중종 14년(1519) 교리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로 관직을 잃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1521년 학포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그림으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양팽손은 서화에 능하였으며 현재까지 전하는 그의 10여 점의 작품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16세기 한국 회화를 대표합니다.
호남 화단의 선구자이자 그의 화풍은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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