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돋보기]전국서 1천여 명 '골드러시'..금광굴 지금도 '생생'(1편)

    작성 : 2024-07-27 10:30:02
    1914년 기차역까지 생겨 신도시 형성
    일본인 근로자 위해 뒷산에 신사 세워
    소유주 최남주 전국에 20개 광산 운영
    영화사 설립 '무정', '수선화' 제작 상영
    [전라도 돋보기]전국서 1천여 명 '골드러시'..금광굴 지금도 '생생'(1편)

    ▲일제강점기 채굴을 시작한 용진산 금광굴 내부 모습

    영산강 원류인 황룡강이 누런 용처럼 꿈틀대며 지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이 곳은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인근 용진산에서 금광이 발견돼 '노다지'로 들썩거린 골드러시(gold rush)의 땅입니다.

    폐광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희미해졌지만, 용진산에는 지금도 금광굴이 여러 군데 남아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금광 갱구가 89개, 금광맥은 천 척(尺) 이상의 것이 11개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의 광물자원 수탈을 위해 전국 각지를 살피던 중 용진산에서 금광을 발견했습니다.
    ◇ 반짝이는 부싯돌, 알고 보니 '노다지'
    그에 대한 일화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돼 있는데,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마을주민들의 구전내용을 채록한 것입니다.

    "일본인 순사가 어느 날 임곡면에 왔다가 한 여인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뒤쫓아 갔다. 여인이 집안으로 숨어버리자 순사는 그녀를 찾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햇빛에 반짝이는 부싯돌을 발견하였다. 부싯돌을 물에 씻어서 가루를 내어보니 재질이 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본인 순사는 여인에게 부싯돌을 구한 장소를 물었고, 그녀는 용진산이라고 대답하였다."

    ▲1914년 1월 개설된 옛 임곡역 [광산문화원]

    이후 일제는 본격적으로 용진산 광산을 개발해 금을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1913년 일제가 부설한 호남선이 개통을 하게 되었는데, 노다지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1914년 1월 임곡역을 개설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인뿐 아니라 수 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광산에 종사하는 일본인 근로자들을 위해 신사를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신사 터가 남아 있습니다.

    ▲마을 뒷산에 남아있는 신사 터

    1937년 1월 17일자 경성일보(일본어판)에는 임곡면 용진산에서 '자연금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어 눈길을 끕니다.

    기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금괴'가 발견됐다는 기사 실려
    "실로 진귀한 자연금괴 노다지가 최남주 씨(광주 갑부) 소유 호남선 임곡면 용진광산에서 1월 4일 채굴되었다. 광산 감독 백홍주 씨와 수 명의 광부가 너무 기뻐서 자동차를 빌려 광주로 옮겨왔다. 그리고 동 금괴를 여관에 두고 언제라도 보물처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금광 갱구는 89개, 금광맥은 천 척 이상의 것이 11개나 되었다. 그리고 광산 감독자는 101명, 광부는 1,100명이 동원되었다. 자연금괴가 발견된 노다지는 제2호 갱구에서 채굴된 것인데, 제5 광맥이 가장 우수하여 전도유망하다."(번역.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용진산에서 '자연금괴'가 발견됐다는 기사가 경성일보(일본어판) [고신문 아카이브]

    용진광산 소유주 최남주는 황해도와 함경북도 등 전국 20여 곳에서 광산을 개발해 '광산왕'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전남 광산군의 사금광을 포함한 용진광산을 경영했으며, 1933년 이를 니혼제련회사에 매각하여 엄청난 차액을 얻었습니다.
    ◇ 최남주, 언제 어디에서 사망했는지 불명
    또한 광주에 소재한 남광광업 사장을 역임하면서 전국 각지의 소규모 금 광산 또는 사금 광구를 관리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함경남도 단천에서 대규모 광산을 운영하는 와중에 해방을 맞이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문헌(위경혜 '광주극장' 2018, 박선홍의 구술 2012.06.04)에 따르면 최남주는 사업차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며 근대화 신(新)문물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1937년 서울에서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해 운영했습니다.

    '무정'(1939), '수선화'(1940) 등 작품을 제작하여 광주극장을 비롯 전국 극장에서 상영했습니다.

    최남주의 손자 최 모씨는 "할아버지가 언제 어디에서 사망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아는 게 없으며, 물려받은 재산도 없다."고 말을 아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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