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ING]"감성이냐 불편이냐" 외국어 간판..사실상 '위법'

    작성 : 2023-06-27 11:03:15 수정 : 2023-06-27 11: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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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2023년 6월, 광주광역시의 '젊음의 거리'로 불리는 동명동의 모습입니다.

    젊은 세대가 자주 다니는 '핫플레이스'에서 유행처럼 설치된 외국어 간판, 사실은 위법입니다.

    -영어는 기본, 일본어도 우후죽순.. "문 앞에서 지도 보고 들어가요"

    박지원 씨(여·22)는 최근 친구들과 일본식 술집을 약속 장소로 정했다가 일본어로 쓰인 간판을 못 읽어 주변을 헤맸습니다.

    한국어 설명 없이 간판 글씨가 모두 일본어로 쓰여 있다 보니 약속 장소가 맞는지 확인에 애를 먹었습니다.

    "느낌으로 저긴가 싶어서 들어갔다가 나온 적도 있고, 매장 근처에서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찾아보고 들어갔다"며 불편함을 토로했습니다.

    ▲ 광주광역시 동명동 거리, 한글 없이 외국 문자로만 표기된 간판


    카페와 음식점이 밀집된 동명동의 점포 30곳을 둘러본 결과, 19곳이 한글 없이 영어만으로 간판을 표기했고, 6곳은 일본어로만 간판이 표기돼 있었습니다.

    일본어는 영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익숙해서인지 작게 한글 표기한 경우도 있었지만, 영어 간판에서는 한글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가게 이름만 작게 한글로 적어두고 '닭요리 전문점'을 일본어로 써둬 정작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젊은 감성을 노렸다곤 하지만 정작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외국어 표기가 과하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평소 여자친구와 동명동을 자주 찾는다는 임창현(남·27) 씨는 "미리 찾아보고 가지 않는 이상 선뜻 들어가기 어렵다"며 "요즘은 주로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가게를 홍보하다 보니 간판이 해야 할 본래 목적을 다 하지 못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어를 사용한다고 미관상으로 딱히 예쁘거나 특별해 보이는 진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전했습니다.

    친구들과 동명동에 온 최소원(여·23) 씨도 "영어 발음을 잘못 읽어 친구들에게 장난 섞인 놀림을 받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어 사용은 가게 '콘셉트', 실제 외국인들은 '신기'

    동명동에서 이국적인 분위기의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 신모 씨(여·35)는 간판을 영어로 표기하는 이유로 '인스타 감성'을 꼽았습니다.

    신 씨는 "외국인들도 종종 방문하기 때문에 영어를 적어두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카페 콘셉트를 위한 인테리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이런 콘셉트를 즐기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도 많았습니다.

    이수민(여·22) 씨는 "가게 인테리어나 메뉴까지 외국 느낌으로 꾸며놓은 곳은 현지식당에 방문한 느낌이 들어 재방문하고 싶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온 아드리안 갈릴레아(남·22) 씨는 외국어를 더 강조하는 현상이 자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라며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전남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레아 메이유(여·22) 씨는 "곳곳에서 영어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외국인으로서는 편리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러 한국에 유학을 온 입장에서는 영어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한국어 공부에 큰 도움이 안 된 점은 아쉽다"고 밝혔습니다.

    -들어가 보면 메뉴판에도 외국어 가득?

    ▲ 인테리어를 위해 외국어로 메뉴판을 표기한 모습


    간판뿐만 아니라 메뉴판이나 공지도 외국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카페나 음식점 리뷰에는 당황스럽다는 반응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동명동의 한 카페에 방문했다는 정모 씨(여·54)는 외국어로만 표기된 메뉴판 때문에 당황했던 경험을 털어놨습니다.

    "케이크 종류가 모두 작은 영어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면서 "황치즈케이크를 필기체로 brown-cheese-cake로 써두니 뭔가 하고 한참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동명동의 한 미국식 피자가게는 메뉴판 전체를 영어로 표기했다가 손님들의 피드백을 받아 한글 설명이 추가된 메뉴판으로 수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인스타 감성의 카페나 맛집 찾아다니기를 즐긴다는 강동우 씨(남·22)는 외국어만 잔뜩 쓰여 있는 복잡한 메뉴판을 한두 곳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면서 "메뉴에 대해 물어보기 번거로워 아는 종류의 음료만 시키게 된다"고 경험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감성을 위해 그러는 건 이해하지만, 메뉴를 주문할 때 발음하기도 불편하고 무슨 음료인지도 모르겠어서 작게라도 한글을 함께 써두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노년층은 "궁금하지만 거리감 느껴져"

    신유진(여·23) 씨는 일본어나 영어만 쓰인 간판을 보고 "문화사대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면서 "나이 드신 분들도 호기심에 방문해 볼 수 있는 건데, 간판이나 메뉴판을 못 읽는다면 소외감을 느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노년층에게 외국어로 쓰인 간판은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빈 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동명동 거리를 둘러보던 류모 씨(여·71)는 "예전과 달리 거리에 외국어가 많아진 걸 확실히 체감한다"면서 "특히 동명동 거리에서 자주 본다"고 말했습니다.

    류 씨는 영어로 쓰인 한 간판을 가리키며, "한글로 쓰인 건 들어가면 뭘 팔겠구나 알겠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저런 곳은 뭘 파는 곳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궁금하긴 해도 거리감이 느껴져서 들어가기 좀 그렇다"며 "그저 젊은 사람들 커피 마시는 곳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류 씨가 커피 마시는 곳인 것 같다며 가리킨 간판은 다름 아닌 영어로 '핫도그(hotdog)'가 쓰인 음식점이었습니다.

    국립국어원은 외국어 남용이 소외계층의 기본적인 의사소통 기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문화연대가 2020년 발표한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일반 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 74%가 일상에서 외국어나 외국 문자 등 외국어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일상 속 외국어 사용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한 비율은 36.1%에 불과했습니다.

    또 연령대가 높을수록 외국어 표현 사용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드러났으며,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외국어 표현조차 세대 간 이해도 격차가 컸습니다.

    이 가운데 70대 이상 응답자 60% 이상이 이해하는 단어는 3,500개 중 242개(6.9%)뿐이었습니다.

    ▲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일반 국민 인식조사


    -간판에 한글 표기 없으면 위법이지만..소상공인만 제지하기는 곤란

    옥외광고물법 제12조 일반적인 표시 방법에 따르면,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맞춤법, 국어 로마자표기법 및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하여야 하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외국 문자를 사용하더라도 한글을 함께 나란히 적어야 합니다.

    또 4층 이상에 설치된 면적 5㎡ 이상의 간판이 이를 어길 경우, 500만 원 이하의 강제 이행금까지 부과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4년 법원은 KB로만 상호 표시를 한 국민은행과 케이티(KT)가 옥외 광고물법을 위반했다는 판결문에서 "국민은행 등의 옥외광고물 중 모두 외국 문자만 기재했거나 외국 문자에 비해 한글이 현저히 낮게 인식될 가능성이 높을 경우 위법한 광고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광주 동구청 도시계획과에 따르면 최근 2개월 기준 특히 동명동을 중심으로 외국어 간판과 관련한 민원은 한 달에 최대 20건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원이 발생해도 강제 사항이 없기 때문에 계도 조치에 그치는 데다 실제로 간판을 수정하는 업장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가게들이 위법을 지적받아도 외국어 간판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데는 '특별한 사유'가 있기 때문인데요.

    상표법에 따르면 특허청에 영어로 등록된 상표를 그대로 표시할 경우 외국어만 쓰인 간판을 걸 수 있습니다.

    '스타벅스', '버거킹', '아디다스' 등 영어로 상표권이 등록된 대형 프랜차이즈들은 영어 간판을 달아도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 영어로 간판을 표기한 대형 프랜차이즈들


    이런 상황에서 소상공인들에게만 한글 표기를 하지 않았다고 제지를 가하거나 상표권을 취득하라고 요구하기에는 형평성의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다 보니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취지의 시행령이 사실상 실효성 없는 법령이 된 상황입니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외국어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중요해 보입니다.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 등을 진행하는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의 이건범 대표는 "투썸플레이스처럼 영어로 쓰인 간판들의 경우 택시 기사가 못 읽는 경우도 많다"면서 "외국 글자만 적혀있는 간판은 외국어 능력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정보전달의 어려움을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한류가 유행하는 시대에 도시 경관의 면에서 외국인이 기대할 한국적인 멋을 파괴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외국어 표기는 사업자의 마케팅 수단일 수 있지만, 도시경관은 시민의 것이기 때문에 그걸 보는 시민들의 눈도 중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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