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이]80년대 해직기자 출신 향토사가 김용휴 시인(1편)

    작성 : 2024-05-04 09:00:02 수정 : 2024-05-05 08:14:36
    44년 전 공수부대 만행 기억 생생, 분노 치솟아
    신문사 난입 저지하려다 곤봉 세례
    언론사 통폐합 여파로 정든 직장 떠나
    한때 출판업 영위..남광주시장에 시비
    [남·별·이]80년대 해직기자 출신 향토사가 김용휴 시인(1편)

    '남도인 별난 이야기(남·별·이)'는 남도 땅에 뿌리 내린 한 떨기 들꽃처럼 소박하지만 향기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남다른 끼와 열정으로, 이웃과 사회에 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광주·전남 사람들의 황톳빛 이야기가 채워질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전남 화순군 동면 자택 마당에서 포즈를 취한 김용휴 시인

    "1980년 5월 공수부대원이 신문사 옥상에 올라가려 하자 이들을 저지하려다 곤봉 세례를 당해 머리에 피가 철철 흘렀지요. 인근 정형외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서야 겨우 출혈이 멈췄어요."

    해직기자 출신 향토사가 김용휴 시인은 44년 전 지옥 같았던 광주 사태를 떠올리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칠 정도로 분노가 치민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신문사가 전남도청과 가까이 있어 공수부대의 가혹한 진압 상황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며, "죽을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절규하듯 말했습니다.

    ◇ 1975년 전남매일신문에 입사 특집부 근무

    올해 팔순인 김 시인은 1975년 전남매일신문에 입사해 특집부에서 근무하던 중 1980년 5·18을 맞았습니다.

    특집부 기자는 기획기사를 담당하기 때문에 시위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대신 항쟁기간 중엔 주로 편집국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태 수습 후 첫 발행된 신문에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가 계엄 당국의 검열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실리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또렷하게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전남 화순군 동면 자택 서재에서 자신의 문학 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김용휴 시인

    "당시 검열관이 전남도청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1면 편집자가 김준태 시인의 시가 실린 교정지를 가지고 가자 빨간 펜으로 13군데나 삭제를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한 "그 때의 1면 교정지와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뒤덮은 대형 태극기 사진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 시인은 언론 통폐합으로 몸담았던 전남매일신문이 전남일보와 합병되면서 비(非)기자직인 출판국으로 쫓겨나자 1983년 사직서를 쓰고 나오게 됐습니다.

    ◇ 도서출판 규장각 설립, 무크지 '민족과 지역' 발행

    이후 김씨는 도서출판 규장각을 설립해 월간 '어린이문학세계' 통권 17호를 발행했고, 무크지 '민족과 지역'을 발행하는 등 한동안 출판업을 영위했습니다.

    또한 1995년 '한맥문학'을 통해 늦깎이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주로 민족의 애환을 주제로 많은 시를 지었습니다.

    특히 남광주시장에 깃든 서민의 애환을 노래한 '남광주에 나는 가리'라는 시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남광주역 폐쇄 전 열차에서 시골 아낙네들이 채소와 곡식 등이 담긴 보따리를 힘겹게 내리고 있는 모습. [김지연 사진작가 제공]

    설레임으로 여기 서 있다
    아쉬움으로 여기 서 있다
    기적소리 없는 새벽 누가 열꼬
    비껴가는 허공의 구름일지라도
    스치는 바람이라도
    기적의 여운이라도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회상시켜 볼 수 있다면
    광주의 아침을 여는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
    삶의 질곡을 푸는
    시골 할매들의
    먼 숨결 소리라도 들으러

    (시 '남광주에 나는 가리' 전문)

    김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남광주시장에 대한 많은 추억을 품고 있습니다.

    술이 고픈 날이거나 해장술을 하기 위해 시장 골목 허름한 목로주점을 즐겨 찾았습니다.

    흔연스럽게 맞아주는 술집 주인이 정겹고 하나, 둘 모여드는 반가운 얼굴들과 질펀한 인생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그의 가슴에는 남광주역 새벽 공기가 녹아들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도심 철도 이설로 남광주역이 사라지자 깊은 회한이 가슴 밑바닥에서 맴돌다 이듬해 터져나온 시가 바로 '남광주에 나는 가리'입니다.

    김용휴 시인은 "남광주에 역이 없어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것이 아쉬워 이 시를 쓰게 됐다."고 회상했습니다.

    ◇ "남광주 역사(驛舍)가 그대로 보존됐더라면.."

    그리고 2002년 남광주시장 입구 한 켠에 '남광주에 나는 가리'라는 시비가 세워져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습니다.

    ▲남광주시장 입구에 세워진 김용휴 시인의 '남광주에 나는 가리' 시비

    "이 시를 당시 박종철 광주 동구청장에게 보여줬더니 시비를 만들어 세우자고 하더군요. 옛 남광주역사(驛舍)가 그대로 보존됐더라면 역사의 산교육장이 됐을 텐데.."라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김 시인은 원래 남광주 역사 폐쇄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사람입니다.

    "경전선 철길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맥을 끊어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광주에 철길을 놓으면서 교도소 농장다리, 전남대 의대에서 조선대 병원 사이, 양림동 융프라우 등 3곳의 능선 혈맥을 끊어 놓았다."며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김용휴 시인의 시화 '고향의 새벽'

    그러나 막상 역사(驛舍)가 사라지자 시인이 오랜 세월 보고 느껴왔던 남광주의 새벽시장은 몰라보게 위축돼 버렸습니다.

    밤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역사에서 물건을 부리던 일꾼들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남광주에 나는 가리' 시는 가수 주하주 씨가 곡을 붙여 구성진 가락으로 재탄생되어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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