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별·이]압해도 애기동백처럼 붉은 시심, 김성호 시인의 '낙화유수'

    작성 : 2024-02-16 07:05:18
    광남일보 신춘문예 등단, '목포는 항구다' 첫 시집
    오랜 침묵 끝 2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상재 계획
    김남주 시인 영향..현실인식 투철
    '남도인 별난 이야기(남·별·이)'는 남도 땅에 뿌리내린 한 떨기 들꽃처럼 소박하지만 향기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남다른 끼와 열정으로, 이웃과 사회에 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광주·전남 사람들의 황톳빛 이야기가 채워질 것입니다. <편집자 주>

    ▲ 봄 기운이 감도는 압해도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김성호 시인. 사진 = 필자

    "시(詩)가 시시한 것의 대명사가 돼버린 지 오래죠. 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는 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시는 제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예요."

    '천사의 섬'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 민들레 홀씨처럼 깃들어 둥지를 튼 올해로 63살이 된 시인 김성호 씨.

    그가 이곳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20여 년을 헤아립니다.

    목포에서 성장한 그가 갯내음 물씬한 섬마을에 농가 한 채를 얻어 머물고 있는 것은 귀농도 귀어도 아닌 시작(詩作) 때문입니다.

    그는 2000년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 중견시인입니다.

    2004년 첫 시집 '목포는 항구다'(동학사)를 출간했습니다.

    이후 오랜 침묵 끝에 20년 만에 올해 두 번째 시집 출간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2일,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남녘으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동서리 서촌마을에서 그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애기동백과 함께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송공산 분재공원을 산책하며 그의 굴곡진 삶과 문학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칭했습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시의 불꽃을 피우는데 허락된 것인 양 범상치 않은 인생 역정을 걸어왔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 틀에 박힌 조직 생활 안 맞아..인생부침 겪어

    전남대 철학과를 10년 만에 졸업한 것부터가 사회와의 엇박자를 예고했습니다.

    졸업 후 고향에 내려온 그는 주간목포(목포신문 전신), 목포투데이, 목포저널 등 여러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약 3년간 열심히 취재하고 편집하며 직업인으로서 경력을 쌓아갈 무렵,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져 그만뒀습니다.

    ▲ 2004년 출간한 첫 시집 '목포는 항구다' 표지

    "틀에 박힌 조직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았어요. 그리고 문학에 전념하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신문사를 나온 그는 노래방 기기 호남총판을 운영하던 지인의 권유로 목포시 죽동 '차 없는 거리', 국제서림 옆에 노래방을 개업했습니다.

    그 당시 노래방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장 핫한 오락장소였습니다.

    "하루 매출이 월급의 2배에 달할 만큼 수입이 짭짤했다"고 호황기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파트도 장만해 가장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3년 정도 지날 무렵, 친척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보증 문제로 자신의 아파트가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 압해도 분재공원 내 미술관에서 동백꽃 작품을 감상하는 김성호 시인. 사진 = 필자

    이를 계기로 노래방을 정리하고 다시 직장을 찾아 전전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입시학원 강사, 초등학생 대상 글쓰기와 바둑기원 운영 등 3년 동안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습니다.

    한 때 모 사립학교로부터 윤리교사 제의도 받았지만 문학과 무관한 과목이어서 선뜻 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어머니는 1~2년간 병상에서 고생하다, 1996년 6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실의 거친 파고에 부침을 겪은 그는 다시 문학에 정진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불혹의 나이에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붕어빵을 굽는 청년'이란 시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심사를 맡은 허형만 시인이 그의 시적 가능성을 알아본 것입니다.

    ◇ 20년 동안 쓴 시 100여 편.. "새로운 모티프 선보일 것"

    이후 그는 홀로 압해도에 들어와 고독한 수행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집 부근 초등학교 지킴이로서 얻는 수입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시를 사색하는 게 그의 일과입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용봉문학회에 참여하면서 김호균, 윤석진 시인과 어울리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시적 지향점을 갖게 됐으며, 특히 김남주 시인의 영향이 컸다"고 밝혔습니다.

    ▲ 압해도 분재공원 내 미술관 북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성호 시인. 사진 = 필자

    현실과 유리된 시, 혼자 머릿속에 상상된 시는 언어유희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낱말의 유기적 연결, 사물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시론을 피력했습니다.

    아울러 최근 유행하는 시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습니다.

    "요즘 시들을 보면 비약이 심하고 난삽하게 느껴집니다. 감성적이긴 하지만 휴머니티가 없습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는 올해 안에 선보일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과는 결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년 동안 쓴 100편이 넘는 시 원고가 쌓여 있습니다. 아직은 미완성이라 더 다듬어야 하지만 새로운 모티프를 선보일 예정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2 시집에는 아무래도 '인생무상', '낙화유수'와 같은 인생 이야기가 많이 담길 것 같다"고 귀띔했습니다.

    "제가 세상을 너무 편하게 살아왔어요. 말이 자유인이지, 삶을 방임 혹은 방치한 거나 다름없지요"라며 세상과 거리두기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늘 시를 몽상하며 붉은 시심에 젖어 사는 그의 모습에서 애기동백꽃 같은 깊은 시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압해도 #시인 #김성호 #남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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