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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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년 광주는 !!

    황용희
    등록일 2022-05-18 01:41:59 | 조회수 110

     

    아랫글은 42년전 보고 겪었던 참상을 적은글인데

    해마다  라디오 게시판에 올린글입니다

     

    이 사연을 방송으로 오늘

    전해서 들을 수 없고 주말에 들을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지난해는 5.18묘지에 참배를 다녀왔는데 올해는 못갔습니다.

    901분의 영령님들이 잠든곳은 이팝꽃의 향기가 진동했고

    42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해명이 되지 않은

    부분들도 많아 노랑 리본에 간절한 염원을 담아 걸어 두고 왔었습니다.

     

    이선희-오월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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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년전 오월 광주는 계절의 여왕답게 화사하고

    가정의 달로 가족의 소중함 일깨우며 변함없이 지금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담장을 넘나들며 빼꼼히 미소짓는 넝쿨장미꽃도

    은은한 향기 풍겨주는 이팝꽃과 아카시아향기도

    햇살 또한 환하게 웃으며 오월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만큼이나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 좋으련만

    42년전 상흔들로 가슴 한 켠이 아려옵니다.

    42년전 제 나이는 꽃띠나이 21살

    고등학생인 남동생과 광주에서 자취를 했었습니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외침 중 오랜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생각나는 것은 "김 대중씨 석방"하라는 구호였습니다.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가 최루탄을 마셔 숨이 막힐 것 같은 무서움과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발길에 밟혀 혼났기도 했으며

    전국적으로 데모가 끊이지 않아 공수부대가 들어와서

    잔인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함부로 돌아 다닐 수 없었습니다.

     

    호기심 많을 나이의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남동생이

    시내를 나갔다가 공수부대들이 뒤따라 오는것을

    겨우 따돌려 대문을 걸어 잠그는 긴박한 소동도 벌이기도 했었습니다.

     

    옥상에 올라가 바라본 시내의 풍경은 mbc 방송국이 불에 타고

    여기저기에서 차가 타는지 고무 냄새와 매연으로 눈물을 흘리고

    또 밤마다 외쳐대는 불안한 방송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

     

    불안한 마음에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거리에 나가 먼 발치서

    바라보노라면 총에 맞아 병원으로 실려오는 처참한 광경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폭도로 내몰린 시민군을 위해 아줌마들께서는

    주먹밥을 해서 나르시고 시장은 문을 닫아 먹을꺼리를 살 수 없었는데

    지금 뒤돌아 생각해 보면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지만 그때 그 광경들이

    전쟁통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 여일의 진통끝인 27일 새벽은 한숨도 잠을 못 잤습니다

    총소리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 써도 총성소리는 끊이지 않았었고

    창밖은 불꽃으로 훤한 대낮을 방불케 했기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한 숨도 못자고 눈뜬 동터온 빛고을의 아침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함이 깃들고 거리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었고 전화도 불통되어

    연락이 두절되니 부모님이 걱정하실 듯 싶어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또 광주 한 개 도시쯤은 없애도 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기에 조용해졌지만

    안심할 수 없고 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모르니

    동생과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고향으로 가자며 길을 나섰었습니다.

     

    전날밤에 잠못들게 했던곳 도청앞을 지나는데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거리 곳곳에 덩그런히 서있는 탱크들만이

    지난밤에 무서운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습니다.

     

    광주는 차가 다니지 않고 화순까지 가야만 고향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헌병들이 지키면서 걸어서 내려가지도 못하게 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내려갈까 고민하던 중

    어느분께서 부근 산아래 마을에 산다고 속이고 가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다행히 가는 길목에서는 헌병들이 단속을 하지는 않았었기에

    먼 거리였지만 일단은 광주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우리 일행은

    무서움에 떨면서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급한 발걸음을 재촉했답니다.

     

    시내에서도 여러구의 시체가 태극기에 덮여 리어커에

    실려있는 것을 보았지만 걸어가는 논두렁 길섶 곳곳에 무참하게

    희생을 당한 시민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얼마간을 걷다보니 차량이 아닌 경운기가 사람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당 경운기 삯은 500원이었는데 고향을 빨리 간다는 생각에 올라탔었습니다.

     

    광주에서 화순까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먼 거리도

    아닌데 그때는 왜그리도 멀게느껴졌던지요.

    화순에 다다르니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마음이 놓였었습니다

     

    그렇게하여 무섭던 광주를 벗어나 고향을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고

    고향에 도착하니 살아서 돌아왔다며 가족, 친지 등 많은분들이

    마중 나오셔서 눈물을 훔치시면서 반겨주셨습니다.

     

    총성 소리며 케케한 체루탄의 냄새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참히 돌아가신 영령들을 생각하면 그 날이 떠오르면서 악몽이 다시 되살아나

    일 년에 한 번쯤은 5.18묘지에 찾아가 조용히 고개숙여 참배를 하기도 한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은 민주화의 대열에 이만큼 가까이 다가왔으며

    민주주의 획과 장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도 합니다.

     

    다시는 독재자나 밀실 권력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며

    처참하게 당했던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진실규명과 함께 반인륜적 학살을

    자행한 책임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없습니다.

     

    5월의 하늘에 핏빛으로 설움꽃을 피운 영혼들을 위해 마음 모아 봅니다.

    5월의 영령들이여 편히 잠드십시요....^*^